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디지털 전환은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등의 디지털기술 확산을 통해 산업구조뿐만 아니라 일자리의 개념까지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단순반복 업무는 자동화되고, 창의적이고 디지털 기반의 역량이 요구되는 직무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기술 진보의 가속화뿐만 아니라 기대여명(60세 男 22.8년, 女 27.4년 더 생존)과 건강수명(67.4세→73.1세)의 증가, 지식 수명의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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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후 출산율은 급격히 하락하여, 2023년에는 세계 최저 수준인 0.72명을 기록하며 초저출산 사회에 진입하였다. 2020년부터는 생산연령인구가 감소세로 전환되었고,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이른바 3대 인구 리스크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러한 인구 구조의 급변 속에서 정부는 교육 격차 완화와 미래 인재 양성을 핵심 대응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제5차 평생교육진흥 기본계획(2023~2027)에서는 학습 연계에 있어 기존의 ‘학위 취득 중심’에서 ‘학위-비학위 간 연계’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하였다. 이는 변화하는 사회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 각 개인이 실제로 수행 가능한 역량을 개발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2008년 고령화와 정보화 사회에 대응하여 성인의 지속적인 능력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추진된 RPL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RPL(Recognition of Prior Learning)은 개인이 학교 교육 외의 다양한 환경에서 습득한 직업 경험, 실습, 연구 활동, 타 기관 교육 등의 학습 경험을 학점 등으로 인정하는 제도이다. 이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 이외의 학습 경로를 제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학습자 중심 교육을 강화하고, 개인이 자신의 경험과 역량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추가 학습이나 경력 개발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로 볼 수 있다. RPL은 사전학습인정제, 선행학습인정제, 학습경험인정제, 선행학습이수제 등 다양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나, 본 글에서는 그 본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경험학습인증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평생학습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이 생애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직업교육, 시민교육, 여가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진다. RPL의 필요성은 인간의 학습이 전 생애에 걸쳐 다양한 국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즉, 개인의 총체적인 역량은 형식학습뿐만 아니라 비형식학습 및 무형식학습을 통해서도 발현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앞서 언급한 사회 변화와 맞물려,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학습 경험을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RPL은 전통적인 학위 중심 교육의 한계를 보완하고, 다양한 학습 경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학습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을 지원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또한, 직업 세계의 빠른 변화와 재교육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RPL은 보다 유연한 학습 인정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평생학습의 관점에서 RPL이 활용된 사례 중 하나는 대학의 평생교육체제 지원사업을 들 수 있다. 대학은 이 사업을 통해 성인학습자의 성공적인 후진학 경로를 마련하고, 일과 학업을 연계한 성인친화적 학사제도의 일환으로 RPL을 도입‧활용해 왔다. 특히, 2013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친 「고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고등교육기관에서 RPL을 적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각 대학은 학과 또는 교과목의 교육내용과 관련된 학습경험을 기준으로 학점 인정 여부를 자체 학칙에 따라 정할 수 있으며, 인정 범위는 「고등교육법」 제23조 제1항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법령에 따라 수립된 학칙에 의거하여, 일정 요건을 충족한 학습경험은 대학 내 정규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비록 고등학력 인정 제도는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사례로는 학습경험인정제를 들 수 있다. 이 제도는 방송통신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쌓은 다양한 학습경험을 심의하여, 이에 해당하는 과목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방식이다. 인정받은 과목 수에 따라 최대 1년까지 조기 졸업이 가능하며, 학습경험의 인정 대상은 평생학습계좌제 평가인정 학습과정, 자격 취득사항, 직업능력개발훈련과정 이수과목,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 등 다양한 영역을 포함한다. 이러한 학교 외 학습경험은 이수인정평가심의위원회의 심의와 평가 절차를 거쳐 공식적으로 인정되며, 해당 과목에 대해서는 수업 및 시험 면제가 가능하다.
이상으로 RPL의 활용 사례를 살펴보았으나, 평생학습을 둘러싼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개인의 학습경험을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RPL에 대한 활용과 논의는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국민들이 실제 활용하고 있고 인지도가 높으며, 운영 기반이 안정적인 국가 제도와의 연계 가능성을 중심으로 평생학습사회에서의 RPL 활용 방안을 고찰하였다. 특히, 학점은행제, 독학학위제와 함께 「평생교육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평생교육 3대 제도 중 하나인 평생학습계좌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국민의 다양한 학습경험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평생교육 촉진과 인적 자원 개발‧관리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평생학습계좌제는 학력, 경력, 자격, 평생교육 이수 경험 등 형식 및 비형식학습은 물론, 동아리 활동, 독서, 취미, 자원봉사 등 무형식학습의 결과물까지 포괄하며, 학습 경로에 관계없이 개인의 전 생애 학습경험을 인정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러한 특성은 RPL과의 연계를 위한 유의미한 접점을 마련해 줄 수 있다. 따라서 본 원고에서는 평생학습사회에서 RPL의 실질적 활용을 도모하기 위해 평생학습계좌제와의 연계 가능성을 조망하고,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평생학습계좌제를 RPL과 연계하여 활용할 수 있는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이 제도가 저학력 성인학습자의 학력 지원 수단으로 기능해왔다는 점이다. 다양한 경제적‧사회적 이유로 정규 교육의 기회를 놓친 성인에게 있어, 정규 학력 취득은 높은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생학습계좌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안적 학력 인정을 지원해 왔다. 검정고시 과목 면제 제공을 통한 시험 부담 완화, 방송통신중‧고등학교 학습경험인정제 이수원 제공을 통한 조기 졸업 지원, 학력인정 문해교육과정 일부 이수에 대한 인정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력 지원 기능은 평생학습계좌제 내 평가인정 학습과정에 한정되어 운영되어 왔다는 제한점이 있다. 여기서의 평가인정이란, 평생교육기관이 운영하는 학습과정이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지를 국가가 평가하여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대상은 주로 비형식학습 결과물인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평생학습계좌제를 RPL 실현의 도구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는 평가인정 체제의 개선이 필수적이다. 무형식학습까지도 인정할 수 있도록 평가인정 대상을 확대하고, 사전 평가인정 중심에서 사후 경험 인정 방식까지도 포함하는 절차 개선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방송통신중‧고등학교의 학습경험인정제 운영 사례를 참고하여, 선(先)이수 경험에 대한 사후 인정 방식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
「평생교육법」 제23조의 개정으로, 초‧중등학력에 한정되어 있던 평생학습계좌제의 학력 인정 범위가 고등학력까지 확대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현재는 법령 개정 이후 학점 및 학력 인정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수립하는 단계로, 이 시점에서 RPL과의 연계를 고려한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 2023년 OECD 교육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OECD 평균인 40.4%보다 12.4% 높은 52.8%이며, 청년층 고등교육 이수율은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우리 사회가 고등교육의 보편화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경쟁이 심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성인학습자에게 대안적 고등학력 취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사회적 평등 실현과 교육 기회 확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안적 학력제도로서의 학점은행제가 기존의 역할을 해왔다면, 이제는 보다 다양한 비형식‧무형식 학습 경험을 포괄하는 고등학력 인정 제도로의 진화가 요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의 경험학습인증제인 ProfilPASS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ProfilPASS는 다양한 비교과 활동과 학습경험을 국가 차원에서 인정하며, 학습자가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인식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취업 등 실질적 진로로의 연결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평생학습계좌제는 이와 같은 국내외 RPL 운영 사례를 고찰하여, 무형식‧비형식 학습의 학습성과를 고등학력으로 인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비형식교육에 해당하는 표준 교육과정만을 학점으로 인정하는 기존 학점은행제와 차별화된 전략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RPL과 평생학습계좌제의 연계는 학교교육 중심으로 경직된 학사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불균형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특히 고등학력의 보편화가 이루어진 현대사회에서, 저소득층, 다문화가정, 노인 등 교육 소외계층에게 학력 취득의 기회를 제공하는 제3의 대안적 학력제도로 기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RPL은 2013년 법적 기반 마련 이후에도 현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으며, 평생학습계좌제 또한 2010년 도입 이후 활용 방안 부족으로 인해 제도 활성화에 한계를 보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제도의 유기적 연계는 다양한 학습 경험의 고등학력 인정이라는 실질적 제도 활용을 촉진하고, 제도의 확장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급변하는 사회 변화 속에서 국민이 생애 각 단계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위기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전략적인 역량 개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RPL과 평생학습계좌제의 상호 연계와 상생은 평생학습사회의 실현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주목받아야 한다.